경북소방본부가 유해화학물질 사고 시 소방관들이 착용하는 ‘화학보호복’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소방방재청이 정한 표준규격은 무시한 채 외국 제품만을 고집하고 있어 논란을 빚고 있다.

경북소방본부는 지난달 17일 ‘특수재난 대응장비’ 및 ‘대테러 및 특수소방장비 구매‘라는 명목으로 화학보호복 총 111벌(각각 62벌, 49벌)에 대한 구매 입찰을 공고했다. 배정 예산만 어림잡아도 2억 3천여 만원에 이르는 수준의 대규모 장비 구매 입찰 건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북소방본부가 소방방재청이 정한 표준규격에 적합하도록 개발된 국산 제품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외국 제품만을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격서를 작성하면서 국내 개발업체의 원성을 사고 있다.

경북소방본부가 공고한 이 화학보호복 규격서에는 ‘미국 NFPA 1991 또는 EN Class1 인증 제품일 것’이라는 문구 등이 적시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국산 제품을 개발해 성능인정을 받은 제품은 입찰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오갈대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구미 불산누출사고 이후 소방방재청은 유해화학물질 누출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소방공무원의 안전확보를 위해 화학보호복에 대한 표준규격을 마련했지만 경북소방본부는 이 조차 준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소방방재청은 2012년 9월 발생한 구미 불산누출 사고 직후 유해화학물질 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소방공무원의 안전확보를 위해 같은 해 12월 21일 ‘화학화재진압복’에 대한 표준규격을 마련한 바 있다.

이후 소방방재청은 해당 표준규격에 대한 성능인정을 위해 한국소방산업기술원에 KFI인정 기준을 제정토록 조치하고 전국 시도 소방본부에 이 같은 기준에 적합한 ‘화학화재진압복’으로 기존 ‘화학보호복’을 대체해 구입토록 지시했다.

하지만 경북소방본부는 소방방재청이 마련한 이 표준규격과 지침을 무시하고 외국산 제품만을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부기관이 국산 제품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소방방재청의 표준규격에 따라 화학보호복을 개발한 해당 업체 관계자는 “소방방재청 표준규격에 의한 한국소방산업기술원 KFI인정 제품이 활발하게 공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제품과 관련 기준은 완전히 무시되어 공고된 것은 잘못됐다”며 “국가 정책 방향에 따라 개발된 제품이 입찰조차 못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외면받는 화학화재진압복 개발 업체 = 현 정부에서는 국내 산업의 육성과 활성화를 위해 규제개혁을 주도하는 등 경제활성화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외국 기업의 제품만을 고집하는 입찰 규격이 제시되자 국내에서 화학보호복을 개발해 생산하는 해당 업체는 황당할 뿐이다.

특히 타 지역의 소방본부의 경우 표준규격에 따라 국내 제품을 구매하는 곳이 많음에도 유독 경북소방본부만 외국 제품으로 입찰을 제한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소방방재청이 정립한 표준규격에 따라 화학화재진압복을 개발해 한국소방산업기술원으로부터 KFI인정을 받은 모 업체는 닭을 쫓던 개처럼 지붕만 쳐다보고 있다.

표준규격에 따른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KFI인정기준이 만들어진 후 이 규격에 따라 인증을 받은 해당 업체는 화학물질보호뿐 아니라 화염에 강한 화학보호복의 국산화를 이뤄내면서 개발 당시부터 큰 주목을 받았었다. 세계에서 6번째이자 아시아에서 최초로 화학보호복을 개발해냈기 때문이다.

소방방재청 구매조건부 개발사업으로 최초 개발된 이 ‘소방용 화학화재진압복’은 중소기업청 성능인증(ECP)과 지식경제부 신기술인증(NET), 올해 초에는 조달청으로부터 우수조달물품으로 지정받아 3자단가 계약까지 체결한 상태다.

해당 업체의 관계자는 “소방방재청의 정책 방향에 맞춰 국가 R&D비용이 투입되고 기업자체의 개발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세계적 수준의 화학보호복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음에도 외국기준에 준한 제품만 입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는 과잉규제로 국내 업체를 외면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화학보호복과 화학화재진압복, 차이는? = 경북소방본부의 입찰관련 담당자는 이번 논란에 대해 “화학화재진압복과 화학보호복은 엄연히 다르다”며 “입찰 규격은 소방방재청 관련 고시에 따라 작성됐고 입찰 과정도 이 고시에 준해 진행 된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화학화재진압복’은 관련 고시에서 정하고 있는 화학보호복과 명칭부터 다르다는 게 담당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화학보호복’과 구미 불산누출 사고 이후 2012년 12월 21일 소방방재청이 표준규격으로 설정한 ‘화학화재진압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간 소방관서에서 사용해 온 ‘화학보호복’은 소방방재청의 관련 고시인 ‘소방용 특수보호복 등의 성능과 유지관리기준’에서 규정하는 특수보호복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이 고시에서는 화학보호복을 신경, 수포, 혈액, 질식 등 화학작용제 및 유해물질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공기호흡기가 내장된 완전 밀폐형으로 제작되는 화학보호복으로 정의내리고 있는데 쉽게 말해 유해화학물질로부터 소방공무원을 보호할 수 있도록 고안된 특수 보호복을 칭한다.

그럼 화학화재진압복과는 다른 점은 무엇일까. 소방방재청의 표준규격 설정에 따라 관련 성능인정 기준(KFI인정)을 제정한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관계자는 “화학보호복은 단순히 화학물질에 대한 유출만 보호하는 것이지만 화학화재진압복은 화학물질에 대한 보호와 함께 화재에 견딜 수 있는 시험을 거친다”며 “가장 큰 차이는 화학보호복으로써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 규격인 NFPA 1991이나 EN Class1에 적합한 화학보호복이라 할지라도 화재에 견디는 화염시험을 받지 않은 상태로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소방방재청과 소방산업기술원은 화학사고 시 동반되는 화재나 폭발 상황을 고려해 화학보호복의 표준규격을 만들면서 이러한 화염시험을 반드시 거치도록 규격을 정립했다.

또한 열방호성능, 화염시험(Flash Fire Test)과 사용자의 열적 스트레스를 방지해 주는 쿨링시스템(공기공급장치), 장시간 사용이 가능한 외부공기유입장치, 렌즈 김서림방지장치 등의 필요한 기능 등도 표준규격에 포함했다.

즉 소방에서 사용되는 화학보호복의 실제 착용자인 소방관들의 활동 특성을 고려해 화재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한 것이 ‘화학화재진압복’인데 수요처는 이 같은 사실조차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기술원의 관계자는 또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산업현장 등은 일반적인 화학보호복을 착용해도 무방할 수 있지만 소방관은 화학물질 사고 시 어떠한 현장에 투입될지 모르고 언제든 폭발이나 화염에 노출될 수 있다”며 “이러한 위험성을 고려해 화재 위험에 대한 보호 성능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재 취약한 화학보호복, 보급 확산 우려 = 현재 경북소방본부의 입찰 규격은 화염에 취약한 화학보호복의 납품도 가능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경북지역에 보급되는 화학보호복은 지역 소방관의 안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화학보호복은 등급에 따라 일반적으로 레벨 A부터 C까지 분류되는데 고위험 구역에서 사용되고 이번에 경북에서 입찰 공고한 사양도 바로 이 레벨A 제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레벨 A제품은 특성에 따라 가격이 큰 폭으로 차이난다. 그 이유는 열방호성이나 사용자의 열적 스트레스를 방지해 주는 냉각장치 등 부가적인 성능을 지닌 제품과 없는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소방 입찰 규격서에는 단순히 NFPA 1991 또는 EN Class1인증 제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부가성능을 갖추지 않거나 비교적 성능이 낮은 제품도 외국 인증품이라며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보통 수입 레벨A 제품은 싸게는 100만원 대에서 최대 600만원에 이르는 제품군이 있다. 이 중 화재안전성 확보를 위해 화염시험(Flash Fire Test)을 거친 화학보호복은 평균 500만원 대에 이르는 제품이고 국내 개발 제품은 270만원의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소방방재청의 표준규격 제정 취지처럼 화재를 동반하는 유해화학물질 사고 지역에 투입되는 소방관의 활동 특성을 고려한다면 화염시험을 거친 제품이 보급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경북소방본부가 설정한 규격은 화재안전성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없다는 시각이 크다.

또한 구미 불산누출 사고 이후 화학사고에 대한 조직과 장비들이 본격적으로 보강되는 시점에서 소방관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화학사고시 가장 큰 위험요인인 화재와 폭발을 대비한 보호복을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소방방재청 업무 연계성 부재로 논란 키워 = 이 논란의 뒤에는 소방방재청 고시와 소방방재청이 설정한 표준규격, 그리고 소방방재청이 내린 지침 간의 연계성 부족 문제가 숨어 있다.

지난 2006년 3월 8일 소방방재청이 제정, 고시한 ‘소방용 특수보호복 등의 성능과 유지관리 기준’에는 특수보호복 중 하나로 화학보호복을 분류하고 있고 그동안 전국 소방관서는 이 고시를 준용해 제품 규격을 설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산 유출사고를 계기로 기존 열기에 취약한 화학보호복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소방방재청 소방산업과는 ‘화학화재진압복’이라는 명칭으로 표준규격을 마련했고 이 표준규격에 따른 성능검증을 위해 한국소방산업기술원에 KFI인정 기준을 제정토록 조치했다.
 
이후 소방방재청은 2013년 4월 5일 이러한 화학화재진압복이 포함된 7종의 개인안전장비를 구입할 때에는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형식승인이나 KFI인정품을 구입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전국 시도 소방본부에 관련 지침을 내렸다.

지난해 11월 20일에는 현행 화학보호복(누출용)을 화학화재진압복으로 대체해 구입 및 운용하도록 하는 내용의 관련 공문도 각 본부에 시달했다.

소방방재청의 관련 표준규격 제정과 두 차례에 걸쳐 시달된 지침. 이 전개과정을 풀이해 보면 유해화학물질 유출사고 시 현장 소방공무원의 화재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화학보호복’을 ‘화학화재진압복’으로 대체해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가장 큰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소방방재청의 관련 고시다. 2006년부터 준용해 온 ‘소방용 특수보호복 등의 성능과 유지관리기준’에는 화학보호복의 성능기준을 외국 기준으로 준용하고 있고 성능검증 기준 규정으로는 ‘특수보호복의 성능검증과 관련하여 국내 검증 기준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특수보호복에 대한 국외 성능 검증기준(NFPA, EN, JIS 등)을 준용 또는 혼용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화학화재진압복’이라는 명칭으로 표준규격을 정립하고 기존 화학보호복을 화학화재진압복으로 대체 구입하라는 지침까지 내렸다면 이러한 고시의 명칭 정비 등 명확한 후속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속 조치가 이어지지 않으면서 기존 고시에 적시된 ‘화학보호복‘을 ’화학화재진압복‘과 동일하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선의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경북소방본부의 입찰 담당 관계자도 취재과정에서 “소방방재청에 기준이 두 개가 있고 이것을 서로 같은 기준으로 적용하려면 관련 규정을 바꾸던지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지침 하달 사실에 대해 반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방방재청이 새로운 표준규격으로 정립한 ‘화학화재진압복’과 고시 내 명칭인 ‘화학보호복’은 사실상 유사한 성능에 화재 안전성을 부가한 규격임에도 명칭 정비 미비로 인해 일선 담당자들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경북소방본부의 이번 입찰과 관련해 화학보호복 또는 화학화재진압복 등 명칭 혼선에 따른 입찰 타당성을 주장한다면 제품의 사용조건과 특성을 알면서도 국산품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또한 경북소방본부가 오히려 제품 성능이 우수하고 국가 R&D자금까지 투입된 국산 제품을 입찰자체에서 제한하고 국내 검증 기준이 정립됐음에도 국외 제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규제개혁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정책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소방방재신문 최영 기자 young@fpn11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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