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5일 오전 5시 경 서울 도봉구 대상타운현대아파트(23층, 1278세대) 207동의 3층 한 세대에서 발생한 화재로 2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화재는 확장된 발코니를 통해 바로 위층의 작은방으로 확산됐고 열려있는 현관 출입구를 통해 나간 연기는 승강로와 계단실을 통해 전층(23층)으로 확산됐다.

화재의 완전진압에 3시간 40분여가 걸렸다고 하니 불길이 무척 거셌던 걸 알 수 있겠다. 사망자 중 한 사람은 7개월된 아기를 안고 뛰어내렸다고 하니 그 화마의 공포가 공감되고 그 부성애에 가슴이 저려온다.

2001년 10월29일 준공한 건물이라는데 화열의 직접 피해가 아님에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화재를 최초 신고했던 사람이 계단실에서 연기로 인해 숨졌다고 하니 전형적인 제연(制煙)의 실패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제연설비의 실패 원인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당연히 제연시스템이 없거나 불량이고 더 근원적으로 계단실 출입문의 불량이다.

근원적인 문제부터 살펴보자. 내가 사는 30년 된 아파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오래된 아파트 계단실 출입문 닫힘장치는 fusible link(가용성 퓨즈)가 달린 도어클로저다. 불길이 와서 덮쳐야만 퓨즈가 녹아 닫히는 것이니, 제연의 가장 큰 환경요소이며 방화구획의 기본요소인 구획밀폐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상용승강기조차 연기의 수직 전파통로가 돼 인명피해를 가중시킨다. 계단실 출입문이 잘 닫히면 제연설비가 없어도 안전피난 환경을 상당시간 유지할 수 있으나 전국에 수백만 가구가 이런 가짜 안전장치로 위험하게 방치되고 있다.

또 20세기에 설계되고 21세기 초반까지 지어진 모든 아파트 급기가압 제연설비는 과거 초보적 기술로 만들어진 무용지물이다. 당시 국내에 처음 도입됐던 차압 개념은 제연에 극도의 혼란을 초래했다.

부속실 제연설비 중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오피스 건물의 급배기 설비나 부속실 배연창뿐일 것이다.

그 시기에 일부에서 제연을 크게 문제 삼은 일이 있었으니 이른바 P0(피 제로 ; 여러 부분의 압력 중 계단실의 압력을 P0) 사건이다. 책임추궁의 위기에 몰린 소방업계는 전전긍긍했으나 기술적 무지로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헛다리짚은 지적 덕분에 적당히 타협해 유야무야됐고 그로 인해 소방업계는 면죄부를 얻었다.

기능 안 되는 제연설비와 fusible link식 방화문의 나몰라 타협이 낡은 아파트의 공통된 현실이다.

이런 아파트에는 일단 제연설비를 없애어 관리 부담이라도 줄이고, 아파트 리모델링 할 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재건축 엄두를 못 내는 아파트는 리모델링도 엄두를 내기 어렵다.

몇 년 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으로 발생한 화재 중 해운대 골든스위트나 두바이 토치타워에선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오래된 아파트 건물에 외면만 리모델링 했던 런던의 Grenfell tower에서는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다.

전국의 낡은 아파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돈 들여 만든 시설이라 아파트 값에 포함되고도 실은 사용에 불편만 초래하는 군더더기일 뿐인 그런 시설이 법에 의해 강제된 것이므로 정부의 책임으로 대책을 찾아야 한다.

국토부, 소방청의 합동 책임이므로 범정부적 대책이어야 한다.

큰돈 안 들이고도 안전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 방안은 흔히 행해지는 관계기관 협의나 용역 등의 권위적 방법으로는 찾기 어렵다. 소방청에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방안을 공모하면 좋을 것이다.

그 공모의 제안 형식도 흔히 하는 복잡무쌍한 방식이면 호응을 받기 어렵다. 아주 자유로운 방식으로 제안할 수 있어야 하고 심사도 그 분야의 권위계층이 아닌 시민단체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언하자면 준공 후 전혀 시험을 안 하는 지금의 제연설비 관리 방식도 큰 문제다. 스프링클러와 경보설비의 신뢰도는 대단히 높지만 제연설비에 대해서는 신뢰도라는 용어를 쓰기가 두렵다.

소방시설 점검비용을 더 받을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제연설비의 성능시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소방시설 점검업계의 두려움이 그 신뢰의 한계를 웅변한다.

방화문의 장애물은 적극 단속하면서도 계단실 출입문의 구조적 장애를 오래도록 방치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에 안주’하는 편의적 관료주의의 부산물이다.

김진수 한국소방기술인협회 회장
김진수 한국소방기술인협회 회장

이 문제의 근저에는 이런 실태를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소방엔지니어링 업계의 위선이 있다.

아파트 발코니를 없애는 바람에 화재가 위층으로 번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스프링클러가 여러 층에서 동시에 작동해 소화용수를 조기에 소진시키는 것도 큰 문제지만 발코니 확장 문제는 일단 얻어버린 법적 기득권 문제라 해결이 어렵다.

여기서는 법과 관계없이 실행 가능하고 또한 해야 할 일을 말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겨우 내 눈을 가릴 뿐이다. 어떤 결과를 만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무슨 노력을 하는지는 눈 가린 나만 빼고 모두가 안다.

2023년 12월27일

김진수 한국소방기술인협회 회장(소방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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