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나는 독일 소방관서 실습 기간 중 출동 소방차에서 직접 촬영했던 ‘운전자들이 일제히 길을 비켜주는 영상’들을 모아 언론에 제보했고 이것이 보도되자 많은 사람은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뒤떨어져 있는 우리의 운전문화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24년 4월 현재, 여전히 독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운전자들의 의식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뉴스를 통해 종종 보도되는 모범적인 구급차 길터주기 영상들은 이를 더욱 실감케 한다. 이러한 영상에서는 차량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지듯 길을 비켜주는 장면이 나오고 덕분에 환자가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훈훈한 사연이 소개된다.
1. 영상은 감동적, 그러나 권장요령에는 없다.
우리 소방관들도 이러한 영상을 보면서 길을 비켜준 운전자들에게 감동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옆에 같이 영상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소방차에게 길을 비켜주려면 저렇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있다.
모범적인 구급차 길터주기 영상이 촬영된 2015년 6월21일 울산 무룡터널, 2016년 9월24일 전주 완주로, 2017년 5월23일 청주 상리터널, 2020년 6월12일 울산 동구 성남동 강북로 등을 비롯해 영상에 나오는 도로는 거의 모두가 2차선(편도 진행 방향 기준) 도로였다.
소방청에서 제작한 소방차 출동 시 길터주기 6대 실천요령에 따르면 이렇게 ‘편도 2차선 도로에서는 1차로에 있던 차들이 2차로로 이동하면서 양보 운전하라’고 돼 있다.
보기에는 잘한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권장하는 요령과는 다른 이 문제는 왜 생기는 걸까? 일단, 소방차 길터주기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독일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독일에서는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방차 길터주기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떠올리는 것은 앞서가던 차량들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을 비켜주는 독일 운전자들의 행동이다. 이를 국내에서는 ‘○○의 기적’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매우 부적절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독일에서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지듯 길터주는 요령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963년 독일 뮌스터에서 교통경찰관으로 일하던 20대의 젊은 칼 하인츠 칼로브 경사는 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정차된 많은 차들로 인해 소방차와 구급차가 현장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서 피해가 커지는 것을 계속 경험하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현장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당시 경찰차나 소방차가 출동하면 비켜줘야 한다는 법 조항은 있었지만 사고로 꽉 막힌 도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켜줘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요령을 규정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차량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서 있기만 했다.
칼로브 경사는 주 내무부에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도로교통법을 개정하자는 제안을 적은 서신을 보냈다.
그는 서신에서 경찰차나 소방차가 다가오면 왼쪽 차로의 차량은 왼쪽으로 오른쪽 차로의 차량은 오른쪽으로 움직여 중앙으로 긴급차가 이동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드는 요령을 제안했다.
주 내무부는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을 오랜 검토 끝에 1967년에 도로교통법에 반영하고 3년의 유예기간 경과 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됐다. 법령개정 후 칼로브 경사의 바람처럼 그가 제안한 길비켜주기 요령으로 인해 교통사고 시 신속한 인명구조와 교통재개에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일에서 소방차가 출동할 때 양쪽으로 갈라지듯 비켜주는 것은 한 젊은 경찰관의 제안으로 도로교통법규에 규정되고 의무화돼 운전자가 이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결코 초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보편적이면서도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결코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3. 독일 소방차 길터주기 요령의 특징
많은 사람은 독일의 모범적인 소방차 길터주기를 접하면서 전체적인 의식수준을 강조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도 없지 않겠으나 독일의 길터주기 요령이 가진 실효성에도 관심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도로 정체 시 길터주기 요령
독일의 도로교통법 제38조에서는 사이렌과 경광등을 작동하는 긴급차량에게 통행을 양보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이 조항은 우리나라 도로교통법 제29조와 거의 같은 취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소방에서 권장하는 6대 길터주기 요령은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도로교통법은 긴급차량의 우선통행을 위한 양보운전 방법에 대해 추가로 조항 하나를 더 규정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제11조이다.
편도 2차선 이상의 고속도로나 시외곽도로에서 보행속도로 움직이거나 정차를 하게 될 경우 차량들은 맨 왼쪽 차로(1차로)와 바로 옆 오른쪽 차로(2차로) 사이에 긴급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구조용 차로(Rettungsgasse)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 조항이 바로 차량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듯 비켜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해서 사고나 과다 교통량으로 인한 정체가 발생한 상황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듯 피양을 하라는 의미이다.
(2) 양보운전 의무자의 범위
우리는 통상적으로 소방차량의 출동 시 길을 비켜줘야 하는 의무를 소방차량 앞에 있는 차량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피양요령을 설명하는 그림에도 소방차 앞에 있는 차량들의 이동만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차로에서 소방차 앞에 있던 차량이 2차로로 이동하려 할 때 2차로에 있는 차량들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속도를 줄이거나 간격을 벌려서 도와주지 않으면 빠르게 양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고의 위험도 따른다.
또 왕복 2차선인 경우 소방차의 앞차가 우측으로 조금 비켜주거나 일시 정차하더라도 반대쪽 차선에서 마주 오는 차량이 정상주행을 하면 소방차가 추월하기 쉽지 않다. 이 두 경우에 소방차가 빠르게 주행하지 못하는 원인이 앞 차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7에서 우측 3개 요령은 우리나라의 요령과 유사하다. 반면 좌측의 3개 요령은 우리와 차이가 있다. 편도 1차선(왕복 2차선)인 경우 소방차량과 주행방향이 같은 앞쪽 차량은 물론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량도 우측으로 비켜줘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 3개 요령은 모두 소방차 앞쪽에 있는 여러 차선의 차량들 모두에 대해 같이 움직여 충분한 공간의 형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도로교통법에 명시된 보행자의 의무
우리의 소방차 길터주기 요령에 분명히 보행자는 녹색신호라도 멈춰서 소방차량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소방기본법에도 통행에 문제를 일으킨 경우, 운전자는 물론 보행자도 처벌 대상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도로교통법에서는 긴급자동차에 진로를 양보해야 하는 의무대상자에 보행자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현실적으로 소방차가 긴급출동 중 횡단보도에서 통행에 지장을 주는 보행자가 있더라도 현장에서 바로 적발하거나 사후에 적발해 처벌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도로교통법에 보행자의 양보 의무 조항이 명시된다면 상당한 의미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도로교통법이 그렇게 개정된다면, 소방차량이 긴급자동차로서 갖는 통행 우선권과 특권에도 불구하고 사고 시 발생하는 책임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소방기본법보다 다수의 국민이 운전면허취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도로교통법을 통해 보행자의 진로양보 의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고 본다.
독일은 어떨까? 세계에서 소방차에 대한 진로양보 의무가 최초로 법령에 규정된 것이 1851년 독일 베를린의 경찰령이었다.
당시 법령에 따르면 보행자, 말을 탄 사람, 그리고 마차는 지역 소방마차가 장애없이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는 조항과 종을 울리거나 횃불로 소방대가 출동하고 있음을 알리라는 조항을 둬 보행자의 소방차 진로양보 의무를 명시했다.
현재의 독일 도로교통법에서도 진로양보의 의무대상자를 모든 도로 이용자로 규정하며 보행자를 포함하고 있어 우리의 도로교통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출동 중 횡단보도를 건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지만 일부 보행자는 소방차를 쳐다보면서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런 행태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4. 결어
20대의 교통경찰 칼로브 경사의 제안으로 만들어져 1970년대부터 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양쪽으로 갈라지듯 소방차에게 길을 비켜주는 멋진 장면은 독일 국내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지속해 오고 있고 더 나아가 인접 유럽국가에서도 이러한 길터주기 방식을 도입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표적인 국가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을 들 수 있다.
일례로 올해 2월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기 위해 수많은 성난 농민들이 트랙터를 도로로 끌고 나와 통행 방해시위를 벌였을 때도 도로 중앙을 비워 긴급차에 대한 배려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양옆으로 갈라지듯 길을 비켜주는 모습은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볼 수 있고 많은 운전자들이 소방차에 대한 진로양보 방법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방의 공식적인 양보운전 요령에는 포함되지 않는 불일치에 대해서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소방차 주행차로 앞에 있는 차량에 집중하는 진로양보의무, 도로교통법에 담지 못하고 있는 보행자의 진로양보의무 역시 출동소방차의 길터주기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나쳐서는 안 될 문제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같은 길 비켜주기 요령을 도입하고 있는 국가 중에서 유독 우리만 사용하고 있고 단어의 고유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기적’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이젠 멈춰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24년 4월19일
조현국 화천소방서 소방행정과장
